
요즘 20대의 인간관계 경험담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굳이?”
굳이 만나야 할까.
굳이 단체 채팅방에 계속 있어야 할까.
굳이 애매한 사이를 유지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써야 할까.
과거에는 인간관계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사회생활의 자산처럼 여겨졌다.
동창 모임, 동호회, 직장 친목회, 학교 선후배, 지인 모임 등 다양한 관계망을 유지하는 것이 사회생활을 잘하는 방법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 세대에게 관계는 무조건 넓혀야 하는 자산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시간·돈·감정·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하나의 자원이 되고 있다.
이를 경제에 비유하면 ‘관계긴축’이라고 부를 수 있다.
1. 인간관계에도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경기가 어려워지면 가계는 소비를 줄인다.
기업은 수익성이 낮은 사업을 정리한다.
정부도 한정된 재원을 우선순위가 높은 곳에 배분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 역시 자신의 자원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관계를 재편한다.
특히 청년들에게 부족한 것은 돈만이 아니다.
시간, 체력, 감정적 여유, 집중력 역시 한정된 자원이다.
그래서 관계에도 선택과 집중이 발생한다.
관계긴축의 구조
모든 관계 유지
↓
관계의 비용 인식
↓
중요도에 따른 구분
↓
핵심 관계 유지
↓
애매한 관계 축소
↓
혼자 보내는 시간 증가
이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감소가 아니라 관계 포트폴리오의 재편이다.
2. ‘친한 사람’과 ‘필요한 사람’의 기준도 달라진다
과거에는 관계의 지속성이 중요한 기준이었다.
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이유로 만나고, 같은 직장을 다녔다는 이유로 친분을 유지하고, 오래 알고 지냈다는 이유로 관계를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관계긴축 시대에는 질문이 달라진다.
“오래 알았는가?”
보다
“지금도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인가?”
가 중요해진다.
따라서 오래된 관계라도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다.
반대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가치관과 관심사가 잘 맞으면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다.
관계의 기준이 시간의 길이에서 관계의 질로 이동하는 것이다.
3. 가장 먼저 줄어드는 것은 ‘애매한 관계’이다
관계긴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완전히 친하지도 않고 완전히 낯설지도 않은 관계이다.
예를 들어
- 가끔 연락하는 동창
-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친목 모임
- 직장 밖에서 특별히 만나지 않는 지인
- 별다른 공통 관심사가 없는 단체 모임
- SNS에서만 연결된 관계
등이다.
이런 관계는 끊어졌을 때 상실감은 크지 않지만 유지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정리 대상이 된다.
경제에서 불황기에 핵심 사업보다 수익성이 낮은 사업이 먼저 정리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4. 관계에도 ‘고정비’가 존재한다
인간관계는 공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
모임에 참석하려면 교통비와 식사비가 필요하다.
연락을 유지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면 감정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갈등이 발생하면 회복을 위해 더 많은 에너지가 들어간다.
따라서 현대인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과거보다 훨씬 명확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관계에도 고정비가 있다.
그리고 생활비가 올라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이 고정비를 다시 계산하게 된다.
5. 그래서 ‘혼자’가 반드시 외로운 것은 아니다
관계가 줄어들면 곧바로 외로움이 증가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둘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혼자 있는 것과 고립되는 것은 다르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자신의 선택이라면 휴식이 될 수 있다.
독서하고, 운동하고, 영화를 보고, 취미생활을 하고, 자기계발을 하는 시간은 관계의 부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청년들의 관계 축소를 단순히 ‘외로운 세대’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숫자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관계인가이다.
6. ‘청년이 노인처럼 관계를 끊는다’는 말이 등장하는 이유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계 변화가 과거 노년층의 인간관계 축소와 비슷한 모습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수록 직장과 학교처럼 자연스럽게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환경이 줄어든다.
이에 따라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좁아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지금의 청년들은 사회생활이 활발한 시기임에도 스스로 관계를 줄이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그래서 이를 ‘청년의 노년화’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현상은 원인이 다르다.
노년기의 관계 축소는 은퇴, 생활환경 변화, 이동성 감소 등과 연결될 수 있는 반면, 청년기의 관계긴축은 경제적 부담, 시간 부족, 가치관 변화, 디지털 관계의 확대, 개인주의적 생활방식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청년이 노인처럼 변했다”고 해석하기보다 관계 형성과 유지의 방식 자체가 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7. SNS 시대인데 인간관계는 오히려 좁아진다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과거보다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훨씬 많아졌다.
SNS에서는 수백 명, 수천 명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연결의 숫자가 늘었다고 관계의 깊이까지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환경에서는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깊게 관계하는 사람은 적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온라인에서 수많은 사람의 일상을 보지만 실제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에 불과하다.
결국 관계의 시대가
‘많은 사람과 연결되는 시대’에서 ‘소수와 깊게 연결되는 시대’
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8. 청년의 관계긴축은 소비문화와도 연결된다
관계가 줄어드는 현상은 소비와 분리해서 보기 어렵다.
한 번의 모임에는 식사비, 교통비, 카페 비용 등이 발생한다.
여기에 의류, 외모관리, 선물, 경조사 등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비용이 따라온다.
생활비 부담이 커질수록 사람은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지불하는 비용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질문은 단순히 돈에 대한 계산이 아니다.
시간 대비 만족도, 감정 대비 안정감, 관계 대비 의미를 계산하는 것이다.
결국 관계에도 소비자의 선택 원리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9. 앞으로는 ‘관계의 양’보다 ‘관계의 밀도’가 중요해진다
미래의 인간관계는 피라미드처럼 변할 가능성이 있다.
1단계 — 핵심 관계
가족, 배우자, 절친처럼 높은 신뢰를 가진 관계
2단계 — 성장 관계
업무, 공부, 취미 등을 함께하며 서로에게 자극을 주는 관계
3단계 — 느슨한 관계
SNS, 커뮤니티, 동창 등 필요할 때 연결되는 관계
모든 사람과 같은 수준의 친밀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마다 다른 거리와 역할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관계의 단절이라기보다 관계의 층위화라고 볼 수도 있다.
10. 관계를 줄이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를 선택하는 능력이다
관계긴축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지나친 관계 축소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를 줄이고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사람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어떤 관계를 남기고 어떤 관계에서 거리를 둘 것인가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좋은 관계는 자신의 세계를 좁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넓혀준다.
나를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사람,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 서로의 성장을 자극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커질 수 있다.
11. 미래의 인간관계는 ‘선택형 사회’가 된다
앞으로 사람들은 더 많은 선택권을 갖게 될 것이다.
직장도 하나일 필요가 없고, 취미도 하나일 필요가 없으며, 커뮤니티 역시 하나에 소속될 필요가 없다.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회사에서는 업무 관계,
온라인에서는 관심사 관계,
취미에서는 취향 관계,
가족과는 정서적 관계
처럼 여러 층위의 관계를 선택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과거의 인간관계가 소속 중심이었다면 미래의 관계는 선택과 취향 중심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마무리 — 관계를 줄이는 시대, 사람을 잃는 것과는 다르다
관계긴축은 인간관계가 사라지는 현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의 가치가 다시 평가되는 과정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는 사실보다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가가 중요해지고 있다.
많은 모임에 참석하는 것보다
어떤 관계가 나를 성장시키는가가 중요해지고 있다.
청년이 노인처럼 관계를 줄이는 시대라는 표현은 다소 역설적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중요한 사회적 변화가 담겨 있다.
과거에는 인간관계를 넓게 유지하는 능력이 사회적 자산이었다면, 앞으로는 자신의 한정된 자원을 고려하면서 관계의 거리를 조절하고 깊이를 선택하는 능력이 중요한 사회적 기술이 될 수 있다.
관계의 시대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다이어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다이어트의 핵심이 모든 음식을 끊는 것이 아니듯, 관계긴축의 핵심도 모든 사람을 끊어내는 데 있지 않다.
내 삶에서 정말 필요한 관계를 알아보고, 그 관계에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는 것.
그것이 관계가 넘쳐나는 시대에 오히려 필요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방식이다.